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군사 ==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대는 제국 존립과 관련된 핵심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그 핵심 부분이 그리스인과 그리스인의 피를 이은 현지혼혈인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양과 질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군대 체계 근간과 유지는 군주와 엘리트 집단이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그 인구수를 늘리느냐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스 정복자들의 후손인 셀레우코스 왕조는 극소수의 그리스, 마케도니아 이주민, 협력한 현지인의 비율을 생각하면 군사적 위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더욱이 국왕의 군위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업적과 군 지휘력에 기반했다. 그래서 소수의 지배 엘리트가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다수의 토착민들을[* 게다가 땅이 워낙 넓다 보니 피지배 종족도 매우 다양하다. 수천 년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들만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제대로 지배하려면 군대의 양,질은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 제국의 중심부는 이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식민도시들에서 거리가 멀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 이주민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설상가상 셀레우코스 제국에겐 비슷한 문제를 가질 수 있는 헬레니즘 국가들이 경쟁자로 도사리고 있었는데, 몇몇 국가는 셀레우코스 제국 못지 않은 재정력을 갖춘데다 근무요건의 필수인 그리스와의 거리 문제에서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우위였다. 즉,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군사적 위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국왕의 권위는 군사적인 업적과 군 지휘력에서 나오는 상황에서도 다양한 악조건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지에 신도시와 군사 식민지를 건설해서 통치와 문화의 거점으로 삼고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 퇴역병들을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이래 퇴역병 정착지로 건설된 도시, 마을로 보냈다. 이 대표적인 군사 식민지가 퇴역병 정착지로 시작한 시리아 남부의 두라-에우포로스이다. 제국은 창건자부터 [[안티오코스 4세]] 시대까지 도시에 [[용병]]과 이주민, 퇴역병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키고 이들에게 토지나 경제적 특권, 수조권을 주는 대가로 이들을 전시에 동원하고 군역을 세습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이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또는,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제국 군사력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에서 오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마그네시아 전투 같은 군사적 실패로 인력이 줄어들고 그리스 인구가 많은 아시아 지역을 상실해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시아 출신들도 클레루코이로 선발했으나, 장교나 정예 부대 자리는 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독점하였다.[* 그래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보단 상황이 훨씬 좋아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상실한 안티오코스 7세의 치세에조차 몇 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그리스계 도시와 그리스인의 숫자가 적고 그리스와의 거리도 멀어서, 그리스계 도시들이 많고 그리스 본토에서 대규모 이주민을 받았던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군사력 약화에 시달렸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 장비나 편제는 거의 대부분 알렉산드로스 시절 마케도니아의 것을 답습하였으나, 비슷한 마케도니아식 군대를 가진 다른 [[디아도코이]] 국가들과의 전쟁 때문에 군대를 더욱 중장화되었다. [[페제타이로이]]들이 사용하는 [[사리사]]의 길이를 늘리고 더 큰 방패를 사용하거나, [[헤타이로이]]들의 방패나 다리 보호대, [[마갑]] 같은 장비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무장 투창병이었던 [[펠타스트]]들도 펠타 대신에 더 큰 방패인 투레오스를 사용하고 갑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이를 투레오포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체인메일]]을 도입하고 로마군의 군제를 일부 도입했다. 사람들은 사슬 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보고 흉갑을 입었다 하여 [[토라키타이]]라고 불렀고, 큰 방패와 사슬 갑옷, 칼을 쓰는 모습이 로마 [[레기온|군단병]]과 닮았다고 해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로마화"되었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000명 정도의 병사([[아르기라스피데스]])만이 로마식의 조직으로 재편되고 무구를 지급 받았을 뿐이며,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주축은 페제타이로이였다.[* 출처: Hellenistic infantry reform in the 160's BC] 셀레우코스 제국은 팔랑크스 특유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부족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페르시아 · 카르마니아 · 뮈시아 · 메디아 · 아라비아에서 기병대와 궁병대, 경보병대를 비롯한 많은 보조군을 데려왔다.[* 라피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아랍인 병력을 1만, 카르마니아인 군대를 5천씩이나 끌고 왔다.] 이 동방인 군대는 봉신군 · 동맹군 · 용병 · 징집병 · 상비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했으며 다헤족과 같은 이란계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자체적으로 그리스인들을 훈련시켜서 궁기병 전력을 갖추기도 했다. 제국은 이란 고원과 [[스텝(지리)|스텝]]의 유목민들과 접촉한 뒤부터 그들의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했으며 직접적인 도입 계기는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으로 추측된다. 또한 셀레우코스 1세가 찬드라굽타로부터 코끼리 500마리[* 사실 이 코끼리들은 이미 늙어버린 코끼리들로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많은 수가 늙어 죽었다.]를 받은 뒤부터 전투 [[코끼리]]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코끼리에게 갑옷을 입히고 상교를 올려 무장을 강화하고 코끼리 호위용 부대를 따로 조직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경쟁 상대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왕국이 인도에서 코끼리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코끼리 수입 봉쇄 조치를 취해 이집트가 군사력을 강화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코끼리 수입처를 아프리카로 바꾸어야 했고, 시리아 전쟁에서 덩치가 작은 북아프리카 코끼리들이 덩치 큰 인도 코끼리에게 겁을 먹어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서 고전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어야 했다. 추가적으로 제국은 [[낫전차]]를 실전에 투입했으나, [[페르시아]]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효용성은 별로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들을 묘사한 삽화들 [[https://cafe.daum.net/historywar/Nwo/285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